[이덕환의 과학세상] 지나치게 파격적인 의대 증원
요약하자면, 의대 증원 자체는 반대하진 않지만 의대 쏠림 현상을 우려하며, 그렇다고 파업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양쪽의 잘못을 지적하는 시각입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584/0000025950?sid=110
의대 증원을 두고 정부와 의료계가 격하게 충돌하고 있다. 현재 3058명인 전국 39개 의과대학의 입학 정원을 한꺼번에 2000명이나 늘리겠다는 지난 6일 보건복지부의 발표가 놀라울 정도로 파격적인 것이 사실이다.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과 오픈런으로 알려진 의료 수급 체계의 고질적인 불균형을 해소하고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늘어나게 될 의료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확고한 입장이다.
국민의 89.3%가 의대 증원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도 있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갑작스러운 대규모 증원의 후유증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자칫하면 대학 교육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너무 무책임한 보건복지부
의학 교육에 대한 보건복지부의 인식이 위험할 정도로 안이하다. 특히 의대 정원을 65.4%나 늘려도 ‘교육·수련의 질 저하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를 밝힌 장관과 차관의 발언이 그 증거다.
특히 “1980년대 초 졸업정원제를 해서 정원의 30%를 더 뽑았지만 교육을 충분히 잘 받았다. 그때 학생들이 대학에서 중진 이상 교수도 하고 아주 좋은 의료를 하고 있다”는 박민수 제2차관의 발언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다. 1981년에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과외·본고사 금지와 함께 밀어붙였던 졸업정원제에서 모든 대학·전공의 정원이 일률적으로 30%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서울대 법대의 입학정원은 무려 360명으로 2배로 늘어났다. 당시 면접 시험장에서 벌어졌던 황당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서울대 의대의 입학정원은 졸업정원제가 시작되기 전인 1979년의 120명이 유지되었고 2009년에는 오히려 108명으로 줄었다.
무소불위의 국보위도 의학교육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결국 추상(秋霜)같이 시행되었던 졸업정원제는 1987년에 폐지되고 말았다. 대학 교육의 질 저하 등의 부작용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학생 수가 늘어나면 교육·수련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보건복지부 장관과 차관의 알량한 궤변으로 덮을 수 있는 문제가 절대 아니다. 늘어나는 입학정원을 교수 인력과 교육 기반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지역 의대를 중심으로 배정하겠다는 원칙이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의대 재학 중의 강의·실험·실습이 부실화되는 문제만 심각한 것이 아니다. 배짱 지원으로 의대에 진학하는 학생들도 감당하기 어렵다. 의대를 졸업한 후의 수련 과정도 부실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갑자기 늘어나는 2000명의 수련의를 받아줄 병원이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질 낮은 교육을 받은 수련의가 넘쳐나는 병원의 진료도 걱정해야 한다. 파격적인 증원 정책을 내놓은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대책은 고작 ‘투자를 확대할 계획’뿐이다.
의사·약사 양성을 양성을 책임지고 있는 보건복지부의 행정이 너무 부실하다. 2000년의 의약분업, 2005년의 의학전문대학원, 2011년의 약대 ‘2+4년제’, 2014년의 원격의료, 2020년의 공공의대 등이 모두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보건복지부의 졸속 탁상행정이었다.
의학전문대학원과 약대 학제 개편은 작년부터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고 원격진료와 공공의대는 시작도 하지 못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의약학 교육과 의료제도를 망쳐버린 보건복지부에 대한 획기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특히 의약학 교육을 더 이상 보건복지부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뜻이다.
● 흔들리는 대학 교육
파격적인 의대 증원의 파장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정부가 내놓은 증원 규모는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가 밝힌 증원 규모 2000명은 서울대(1844명)·연대(1518명)·고려대(2081명) 자연계열의 입학정원에 맞먹는다.
KAIST 등 4대 과학기술원의 입학정원을 모두 합쳐도 1700여 명일 뿐이다. 사실상 수능에서 미적분·기하와 과학을 선택하는 소위 ‘자연계열’ 학생들에게는 최상위권 대학이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다.
IMF 이후에 본격화되기 시작해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른 ‘의대 쏠림’이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의대는 단순한 ‘쏠림’의 대상을 넘어서 교사·직장인은 물론 초등학생까지 무차별적으로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수밖에 없다. 최상위권 대학의 이공계열에 진학할 학생들이 모두 의대로 몰려가게 된다. 정부가 애써 강조하는 반도체·AI도 블랙홀로 변해버릴 의대의 광풍에서 온전하게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생만 의대로 몰려가는 것이 아니다. 이미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도 의대 광풍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보기만 하지 않을 모양새다. 최상위권 대학의 이공계열의 재학생이 학업을 포기하고 의대로 빠져나간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학생들의 대규모 연쇄 이동도 불가피해진다.
‘SKY서성한’과 ‘의치한약수’의 편입학 광풍이 대학 사회를 뒤흔들 것이다. 이제 이공계 대학은 신입생은 물론 편입생을 찾기 위해 연중무휴로 애간장을 태워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지역 의대의 ‘지역인재전형’을 노리는 초등학생의 ‘지방 유학’이 등장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지역인재 전형을 60% 이상으로 확대하면 비수도권에 위치한 27개 의대의 지역인재전형의 경쟁률이 수도권에 비해 낮아질 것이기 때문에 의대 진학을 위해 지역으로 이주하는 학생과 학부모가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가족 해체의 원인이었던 ‘기러기 아빠’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교육 당국의 학원 특별 점검과 사교육 카르텔 수사로 잔뜩 움츠렸던 사교육 시장이 ‘의대 특수’로 화려한 부활을 꿈꾸고 있다. 의대 증원 발표 이후 대학생·교사·직장인의 문의가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공계 학생들은 물론 수의대·약대와 같은 의약학 계열의 관심이 뜨거운 모양이다. 의대 준비생이 올해 1만 명에 이르고 내년에는 1만5000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이다. ‘N수생’도 역대급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자칫하면 의대 증원이 대학 사회 전체를 연쇄적으로 뒤흔드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교육부가 고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해서 보건복지부가 촉발한 의대 증원에 의한 혼란에 기름을 끼얹고 있다. 대학 내의 벽을 허물겠다는 취지다. 예과 2년과 본과 4년으로 구성됐던 의대 수업도 ‘예과+본과 6년 범위’에서 대학이 자율적으로 설계하도록 허용한다. 2학년 이상에게만 허용됐던 전과(轉科)를 1학년 학생에게도 허용한다. 단과대학·학과를 기반으로 하는 학사행정 체계에 자율화한다. 대학을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리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 의료계의 거친 반발
의료계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파격적인 증원으로 의사 양성 교육·수련 체계가 무너지고, 궁극적으로는 의사의 수가 너무 많아져서 사회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의료계의 입장이다. 정부의 안이한 인식과는 정반대의 입장이다.
의과학 분야 석학들이 모인 의학한림원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의대 증원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교육 현장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증원의 규모를 적절하게 조정하고 의대 정원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의대 증원으로 의료 수급 체계의 고질적인 불균형을 해소하겠다는 정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당장 내년부터 의대 정원을 늘리더라도 의대 입학생이 수련의 과정을 모두 마치고 온전한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기까지는 무려 14년을 기다려야 한다. 의대 증원이 응급실 뺑뺑이나 소아과 오픈런과 같은 당장의 현안을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의사의 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당장 인력이 필요한 소아과·외과·산부인과·응급의학과 등의 필수 진료과목과 의료 소외 지역의 현실이 개선된다는 보장도 없다. 특히 수도권 진료를 선호하는 우리의 현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정책적으로 지역 의사의 수를 늘리더라도 의료 수요는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현실이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다고 의대 2000명 증원 상태가 계속되면 조만간 새로운 사회 문제가 발생한다. 현재 14만 명인 의사의 수가 2040년에는 46%가 늘어난다. 2050년에는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현재 2.84명에서 5.60명으로 늘어나서 경제협력기구(OECD)의 평균인 5.48명을 넘어선다. 본격적인 ‘의사 과잉’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뜻이다. 2000년 의약분업 사태 이후 의대 입학정원은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되어버린 탓이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3일 어설프게 내놓은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에 대한 의료계의 반응도 차갑다. 파격적인 의대 증원의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정부의 투자가 대형병원으로 집중되어 의료 소외 지역은 더욱 어려워진다는 것이 중론이다. 심지어 ‘필수의료 패키지’가 사실은 ‘의료멸망 패키지’라는 지적도 있는 형편이다.
의료계의 거듭된 거친 반발도 걱정스럽다. 의료계가 우리 사회의 보건·의료 정책을 책임지고 있다는 무거운 책임감은 찾아볼 수 없다. 단순한 의대 증원의 문제가 무엇이고 필수진료과목과 지역의료가 무너지게 된 진짜 원인과 대안이 무엇인지를 국민에게 설득하는 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의료계가 자신들의 이익만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일반 인식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의사 파업은 2000년, 2014년, 2020년의 3번으로 충분했다. 의료계는 일반 근로자와 달라야만 한다. 물론 정부도 쇠고집을 부릴 일이 절대 아니다. 부디 정부와 의료계가 머리를 맞대고 합리적이고 원만한 해결책을 찾아내야만 한다.
※필자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 교육, 에너지, 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2900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